
BTOB
학원물 합작
[현식/은광] 선생님, 선생님
w. 푸드덕
교실 앞 칠판에 색깔별로 놓인 질 낮은 분필로 또박또박 판서를 하던 선생님의 오른쪽 바지 주머니는 늘 분필 가루로 얼룩이 져있었다. 칠판과의 마찰로 인해 하늘에 날리던 분필가루로 앞자리에 앉은 아이들이 연신 콜록거려도 선생님은 손 글씨를 고집했다. 뭐랬지, 클릭 한 번으로 해설과 답이 전부 나타나는 건 매력이 없다고 그랬었나. 자고로 수학은 한 문제를 진득이 잡고 풀어나가는 매력이라고. 숫자를 쓰고 식을 정리할수록 서서히 맥락이 잡혀나가는 게 진정한 수학이라고.
선생님의 수업을,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그런 생각이 들었다. 선생님은 정말로 교육이 좋아서 이 직업을 선택했구나, 하는. 그런 생각. 어쩌면 직업에 대한 열망이 선생님을 상대적으로 어린 나이에도 교직에 올라올 수 있게 해준 게 아니었을까 싶기도 했다. 선생님은 웬만한 기간제 선생님들과 비교해도 현저히 어린 나이였으니까. 솔직히 말하자면 1학년의 절반을 보내는 동안 선생님께 수학 수업을 들으면서 남은 2년 중 못해도 한 번은 선생님이 담임을 맡아줬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었다. 그만큼 선생님은 다정하고, 아이들─그리고 나─를 좋아했으며, 선생님이 내가 속한 반의 담임을 맡아준다면 그 해의 학생부는 어때도 상관이 없겠다는, 고등학생으로서는 엄한 상상을 하게도 만들었다. 부러웠던 것 같았다. 선생님의 모든 면들이. 그 점들을 닮고 싶었고, 닮기 위해 선생님과 더 가까워지고 싶었다. 수많았던 생각들 중 내가 입 밖으로 꺼낼 수 있었던 건 우습게도 개연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앞으로도 행복하셨으면 좋겠다,’는 말뿐이었다. 오지 않을 줄 알았던 날에 해야 했던 말이었다.
열일곱과 스물아홉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벽이 존재했다. 내 열일곱 안에 학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듯 선생님의 삶 역시도 학교에만, 교단에만 국한되어있지 않았다. 선생님은 성인이었고, 선생님의 인생이 존재했으며, 그 안에서 내가 들어갈 수 있는 자리는 굉장히 미미했다.
“아, 현식아.”
“네?”
“선생님, 이제 선생님 그만둘 것 같아.”
“…네? 왜요?”
학생한테 이런 얘기까지 해주기 웃기긴 한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우리 현식이니까 얘기해줄게. 아냐, 농담 아니야. 현식이가 얼마나 좋은 학생인데. 그러니까, 쌤이 어쩌다 보니까 좀 유명한 집안의 자제분이랑 결혼을 하게 됐는데, 하하, 정말이야. 청첩장 나오면 현식이는 꼭 줄게. 와줘야 돼? 아이구, 이야기가 자꾸 새네. 어쨌든 그런데 그 분이 선생님은 사회생활 안 하고 집에 있어줬으면 좋겠다고 그래서. 사실 쌤네 집이 좀 어려워서 이번이 되게 좋은 기…회거든. 기회라고 그러니까 좀 이상한가? 뭐 그래갖고 결혼하고 이제 선생님은 그만두려고……. 애를 잡아두고 별 얘기를 다 하네. 못 들은 셈 쳐도 괜찮아. 그냥 누구한테는 말해주고 싶었어. 다른 선생님들도 모르시거든.
수학이 4교시에 들었던 어느 수요일에 나눈 대화였다. 대화라기보다는 선생님의 일방적인 정보 전달, 그러니까 굳이 비교하자면 수업과 비슷한 것이었지만. 종이 치자마자 급식실로 달려가는 아이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선생님은 문득 나를 붙잡고 긴 이야기를 구구절절 꺼냈다. 간단히 요약하면 배우자 때문에 선생님을 그만둔다는 내용이었다. 그 간단한 내용을 길게 풀어서 설명하는 게 참 선생님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굳이 안 그러셔도 되는데. 마지막이라는 단어는 잘 실감이 나지 않았다. 아직 선생님은 내 앞에서 웃고 계셨고, 내 휴대전화 안에는 그 짧은 시간 동안 선생님과 나눈 무수한 연락들이 남아있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그래서 오히려 아무렇지도 않았던 것 같았다. 어색하게 웃는 선생님의 얼굴을 봐도 별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냥 배고프다? 애들이 먼저 줄 서서 기다리고 있을 텐데. 그런 몇 분 뒤의 일들만 고민하고 있었다. 현실감 없는 이야기였기에 그랬던 것 같았다. 그리고 다음 날, 선생님은 학교를 나오지 않았다.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그렇게 5일이 흐르고 다음 주의 월요일이 찾아온 날, 선생님의 번호로 온 짧은 문자 한 통이 휴대전화를 빛내고 있었다. 막 석식을 먹고 양치질까지 마친 뒤 교실로 돌아와 문제집을 펼쳤을 때였다.
‘투윤예식장 다다음주토요일 열두시반! 심심하면놀러와~’
…아. 대략 그 때쯤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았다. 차라리 죽는 건 어떨까. 오늘은 살기 너무 힘든데. 그 생각의 원인이 선생님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냥, 그냥 첫 번째 문제부터 막히던 수학이 야속해서 든 생각이었다. 마찬가지로 풀리지 않는 다음 문제도, 그 다음 문제도. 꼭 청첩장을 주겠다는 마지막 약속을 짤막한 문자로 대신한 선생님이, 자신의 결혼식에 놀러오라는 표현을 쓰는 선생님이, 작별 인사를 할 시간도 없이 떠나버린 선생님이. 선생님이 보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2주 뒤의 토요일에 문자에 적힌 장소로 향했다. 학생이니 이해해줄 것이라는 생각으로 다음 달의 용돈까지 앞당겨서 모은 10만원을 주머니에 넣은 채였다. 축의금으로 얼마가 적당한지는 알 수 없었다. 내 손으로 부조금을 내는 것 자체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식장은 북적거렸고 그 크기는 비대했다. 선생님의 신상은 비공개로 남기기로 했지만 결혼식 자체를 감추고 싶지는 않았다는, 어제 검색 중 알게 된 신부의 입장을 그대로 대변해주는 곳 같았다. 어지럼증이 몰려왔다. 눈앞이 빙글빙글 돌았다. 먼발치에 위아래를 흰 정장으로 맞춰 입은 선생님이 보였다. 환하게 웃으며 하객들의 인사를 받고 있는 선생님의 깔끔한 옷차림과 내 팥죽색 넥타이가, 중학교 졸업 기념으로 샀던 남색 롱코트가 비교되었다. 그나마 갖고 있는 단정한 옷이라 주말임에도 불구하고 챙겨 입은 교복이었지만 고급스러운 옷차림의 무리 사이에서 난 이 공간과 그저 전혀 어울리지 않는 꼬마였다. 재빨리 축의금을 내는 곳으로 발을 옮겼다. 선생님 앞에 설 자신이 없었다.
“신랑 측?”
“아, 네.”
“관계는요?”
선생님과 나의 관계는 무엇인가. 이제 선생님은 더 이상 선생님이 아니었고, 그랬기에 나는 그의 제자가 아니었다. 한참을 망설이다 꺼낸 대답은
“은광이 형 아는 동생이에요. 임…현식이라고.”
하는 것이 전부였다. 대충 봐도 신랑보다 한참을 어린 아이가 꺼내는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던 직원은 곧 내 주머니에서 나온 돈 봉투를 탁자 아래의 서랍에 집어넣으며 가보라는 손짓을 했다. 내 옆에 선 신부 측 하객이 건네는 두툼한 봉투 안은 온통 노란빛이 돌았다. 못 본 척했다. 뒤돌아서 출구 쪽으로 발을 내딛는 순간 선생님의 시선이 나의 쪽으로 꽂혔다. 타박거리며 걸어오는 선생님의 발소리가 그것을 입증했다.
“현식아! 왔으면 인사는 하고 가야지. 밥도 안 먹었을 텐데 식 보고 밥 먹고 가.”
“아니에요, 쌤. 저 있다가 학원 있어요.”
“이젠 선생님도 아닌데 뭘. 형이라고 불러, 형. 하하하.”
‘학원’이라는 단어가 모든 공간 속에서 홀로 부조화를 이뤘다.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어른들의 세계에 철없이 끼어든 멋모르는 고등학생이 된 기분이었고, 실제로 그것이 현재 내 처지였다. 선생님에게는 무엇보다 명백한 선생님의 삶이 있었고, 그 안에 내가 개입할 수 있는 부분은 하나도, 하나도 없었다.
앞으로는 선생님이라고 부를 필요도 없다지만, 그래도 당신은 나의 영원한 선생님이었다. 그게 나와 당신을 맺어준 연결 고리였고, 나는 그 호칭 덕에 당신을 알았다. 그랬기에 당신을 선생님이라고 부르지 않는 순간부터 우리는 영영 끝이 날 것 같아서. 어떠한 공통점도 존재하지 않는 12살 차이의 남남이 될 것 같아서 당신을 부르는 내 호칭을 차마 바꿀 수가 없었다. 소리 내어 웃는 당신의 얼굴이 예쁘다는 생각을 함과 동시에 구역질이 밀려왔다. 그것은 일종의 환멸감이었다. 가질 수 없는 사람을 욕심낸 내 자신에게 이는 분노. 그만 둘 수도, 계속할 수도 없는 자기혐오를 잠시나마 뒤로 밀어둔 채 천천히 입을 뗐다. 오지 않기를 바랐던 날에 해야 했던 말이었다.
“선생님.”
“응? 왜?”
“앞으로도, 행복하셨으면 좋겠어요.”
그렇게 말하며 지었던 내 웃음과 내 말을 들으며 지은 선생님의 웃음이 가진 뜻은 분명 다른 것이라는 생각에 그 외에는 다른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난 남은 열일곱을 처음 보는 선생님이 진행하는 수학 수업과 함께 끝낸 뒤 이후의 삶 역시도 살아갈 것이었고, 선생님은 누구도 알지 못할 감춰진 신분의 재벌집 사위로 일생을 편안하게 살 것이었다. 어려운 형편이라는 자신의 집에 돈도 부쳐주면서.
앞으로 행복하셨으면 좋겠다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식장을 빠져나왔다. 결혼식은 볼 자신이 없었다. 타인과 팔짱을 끼고 많은 이들의 축복을 받으며 사랑을 서약할 선생님을 내 두 눈으로 볼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제야 난 깨달았다. 내가 그에게 갖고 있던 감정은 선생님으로서의 동경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조잡한 것이었음을. 내가 없는 선생님의 삶은 행복하기를. 그런 절망적인 소원을 빌었다. 소리 내어 뱉어내지 않았기에 유일하게 진심이 담긴 소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