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TOB
학원물 합작
[민혁/은광] Little star
w. 푸드덕
“와, 벌써 이학년이네. 시간 진짜 빠르다, 그치?”
“그러게, 입학한 게 어제같은데.”
“난 우리 당연히 같은 반 될 줄 알았거든. 갈라져서 진짜 너무너무 아쉽다. 나 친구 어떻게 사귀어, 민혁아…….”
“인기만 많으면서 엄살은.”
입에 문 아이스크림을 쪽쪽대며 은광은 뭉개진 발음으로 잘도 종알종알 떠들었다. 다른 반이 될 것이라는 사실쯤이야 민혁은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던 일이었다. 둘의 성적은 고만고만했으니까. 오히려 은광이 반배치고사를 망친 덕에 둘은 같은 반에 배정되어 1년을 보낼 수 있었던 것이었다. 봄을 밀어내고, 여름을 버티고, 가을을 참고, 겨울을 넘어가자 해는 바뀌어 다시 봄이 찾아왔다. 처음 만났던 3월에서 1년이 훌쩍 흘러 어느새 달력은 그 다음 해의 3월을 가리키고 있었다. 울상을 짓고 아쉽다는 말을 강조하는 은광을 보며 민혁은 낮게 웃었다. 나란히 흔들리는 그네가 유난히도 무거웠다.
별의별 이야기가 다 담긴 놀이터였다. 시험이 끝난 뒤 pc방을, 당구장을, 영화관을 가자는 다른 친구들의 제안을 거절하고 언제나 단둘이 찾아온 곳이었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미끄럼틀이나 그네도 탔었고, 목숨이 10개씩은 된다는 남고생들답게 그네 멀리뛰기 같은 내기도 했었고, 가까이에 위치한 편의점에서 과자와 음료수를 가득 사와 둘만의 파티도 열었던 곳이었다.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수많은 추억들에 민혁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런 그를 빤히 바라보던 은광은 무엇인가 생각난 것이라도 있는지 두 손을 한 번 맞부딪히고는 입을 열었다.
“우리 방학식 전날에 영화 봤었잖아. 네가 재미없다 그래서 별 미련 없었거든? 근데 그거 엄청 재밌더라. 너 알면서 그랬지!”
“뭘 알면서 그래, 난 별로 재미 없었어. 내용도 하나도 기억 안 나고. 그리고 너 공포영화 안 좋아하잖아.”
“무서운 장면만 없으면 괜찮아. 어, 근데 내가 너한테 그거 말해준 적 있었나?”
*
“아아─, 쌤! 영화 봐요!!”
겨울 방학식이 있기 하루 전날이었다. 1교시부터 영화를 보자고 징징대는 반 아이들 사이에서 은광은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로 책상 위에 엎어져있었다. 짝이 없는 자리 배치였지만 은광의 바로 옆 분단에 앉은 민혁은 걱정스러운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옆으로 돌린 은광의 얼굴 속 표정은 한껏 찌푸려져있었다. 무슨 일 있었어? 얼굴이 왜 그래. 그렇게 묻는 민혁의 목소리에야 은광은 겨우 눈을 뜨며 기지개를 켰다. 시끄러운 교실 속에서 둘만의 세계가 열렸다. 주위의 소음이 서서히 차단되고, 은광을 제외한 배경이 희뿌옇게 흐려지고, 오직 은광의 모습만이 민혁의 눈 안에 선명하게 담겼다. 그야말로 만화같은 일이었지만 세상에 불가능이 어디 있을까. 그 사이에 결국 선생님도 굴복했는지 아이들의 환호성 소리와 꺼진 전등으로 인해 어두워진 조명 아래에서 은광은 제 의자를 끌고 와 민혁의 옆에 앉았다.
“아니, 그냥 좀 피곤해서……. 어제 밤 샜거든.”
“뭐하느라고.”
“게…임…….
사그라드는 목소리로 은광은 우물쭈물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민혁은 은광이 게임하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다. 스스로가 게임 자체를 즐기는 편도 아니었지만 무엇보다도 은광이 한 번 게임에 빠진 날이면 학교에 이런 몰골로 나타나는 일이 다반사였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게임을 하느라 밤을 샜다는 그의 말에 민혁은 아프지 않게 은광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교실 앞에서는 영화 배급사 특유의 영상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무슨, 초자연적 기현상의 원인들을 차근차근 밝혀나가는 영화랬나. 파라노말 액티비티 같은 거. 확 튀어나오는 장면보다는 복잡하고 세세한 설정으로 공포영화 치고는 올해 엄청난 주목을 받은 작품이었다. 영화가 시작할 때부터 민혁의 어깨에 기대어 꾸벅꾸벅 졸던 은광은 곧 잠이 들었다. 영화 속 세계관을 설명하는 짤막한 나레이션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민혁의 어깨에 머리를 올려놓고있던 은광은 자세가 불평했는지 한참을 꼼지락댔다. 잠시 후 민혁의 품에 반쯤 안긴 모양새로 그의 무릎을 베고 누운─다리는 자신의 의자에 올려놓은 상태였다─은광은 한결 편하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감은 눈과 반대 방향으로 호선을 그린 얇은 입술이 예뻤다. 몸을 뒤척일 때마다 따라 흔들리던 갈색 머리칼이 그렇게 사랑스러울 수가 없었다.
은광이 일어난 것은 각 시간이 끝났음을 알리는 종이 두 번이나 친 뒤였다. 눈을 부비며 일어난 은광은 교탁 앞에 서있는 선생님이 바뀐 것을 보고는 놀랐는지 졸음이 가득 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민혁을 바라봤다.
“헐, 나 오십분 내내 잔 거야?”
“쉬는 시간까지 썼으니까 꼬박 한시간을 잤네.”
“불편했을 텐데 그냥 깨우지 그랬어. 영화 재밌었어? 저거 되게 보고 싶었던 건데, 아쉽다.”
“별로. 내용도 하나도 눈에 안 들어오더라.”
“진짜? 은총이가 완전 개쩐다 그랬는데.”
민혁이 영화의 내용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자신에게 제 몸을 고스란히 맡긴 채로 색색거리던 은광의 숨소리가 귓가에 가득해서, 긴 소매에 절반이 가려진 작은 손가락이 자꾸 눈에 밟혀서, 춥지도 않은 교실에서 발그레해진 볼이 귀여워서, 흐트러진 머리를 매만져줄 때마다 살며시 올라가던 그의 입꼬리가 야속해서, 두꺼운 옷 아래에서도 오르내리는 것이 분명하게 보이는 가슴팍이 신경쓰여서. 진부하기 짝이 없는 표현이었지만 민혁에게 있어 은광은 그야말로 하늘이 내려준 천사같았다. 그의 동작 하나하나에도 민혁은 자신의 세계가 송두리째 흔들리는 기분이었다. 태어나 처음 하는 짝사랑의 대가가 이렇게도 가혹할 줄은 몰랐던 일이었다. 이렇게 무수한 이야기들을 알 턱이 없는 은광은 그저 미소지으며 대화의 주제를 바꿨다.
“나 네 옆에서 자서 그런가? 자면서 꿈 꿨는데 너 나왔어.”
“그래? 무슨 내용이었는데?”
“그냥,”
10년 뒤였는데 우리는 계속 같이 있더라고. 그래서 네가 나한테 ‘거봐, 내가 우리 몇 년이 지나도 함께일 거라고 그랬지?’ 이러면서 되게 뿌듯하게 웃었어. 손깍지도 끼고 막 그래서 지금 생각해보니까 오글거리는데 그 때는 별 생각 안 들더라. 그냥 기분 좋다? 기쁘다? 뭐 그런 거. 넌 스물일곱이 돼도 잘생겼더라. 어쨌든, 그 꿈처럼 우리 계속 같이 있었으면 좋겠다.
세상의 모든 것은 차례로 변해갈 것이었다. 영원할 것만 같았던 학창시절은 끝이 나고, 없으면 어찌 살까 걱정스러웠던 소중한 친구들은 뒤로 한 채 다른 인연을 사귀게 되고, 두 번 다시 없을 듯했던 사랑을 잊어가고. 그렇게 변해가는 세상 속에서, 이길 수 없는 세월 속에서 민혁은 살아가야 했다. 전하지 못한 마음은 영원히 가슴 깊숙한 곳에 끌어안은 채로. 비록 많이 부족하고, 또 때로는 많이 힘들겠지만, 감춰왔던 속마음이 어느 순간 저도 모르게 튀어나올 지도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쉽게 드러낼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차라리 없는 일로 치부하는 게 나을 터였다. 지금까지 유지해온 둘의 관계를 위해서라도. 은광의 말마따나 10년이 지나도 함께 있기 위해서. 말할 수 없는 진실을 눌러삼키느라 한동안 말이 없는 민혁에 은광은 머쓱한지 웃으며 조막만한 손으로 민혁의 어깨를 콩콩 때렸다. 왜 말을 안 해애─! 말꼬리를 늘리며 투정을 부리는 은광을 보며 민혁은 웃어보였다. 그저 은광이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이상으로는 바랄 것이 없었다.
“그러게, 너랑 계속 같이 있고 싶다.”
말할 수 없었다. 말하면 안 됐다. 내 품 안에서 곤히 자던 네 모습은 너무나도 사랑스러웠다고. 네가 내 꿈을 꾸는 동안 나 역시도 네 꿈을 꿨노라고. 민혁은 은광을 향해 미소를 짓는 것으로 모든 말을 대신했다. 은광이 마지막까지 웃음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길 바라면서.
*
나는, 입학식 날에 네가 학생 대표라고 그래서 진짜 깜짝 놀랐었어. 내 옆에 서있던 애가 갑자기 단상으로 올라가갖고 헉 뭐지? 이러고 있었거든. 그게 벌써 1년 전이네. 민혁의 삶 속 단 한 번밖에 찾아오지 않을 열일곱 살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은광으로 가득했다. 예비 소집일날 우연히 마주쳤던 그는 누구보다 눈이 부셨으며, 중학교 동창으로 보이는 친구에게 배치고사가 어려웠다고 투정을 부리며 짓던 웃음을 처음 본 순간 민혁은 그야말로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다. 첫눈에 반한다는 둥 어쩐다는 둥 하는 진부한 말 따위에는 관심도 없었건만 은광은 그 짧은 순간에 민혁을 통째로 쥐고 흔들어놓았다. 입학식 당일 다시 만나게 된 웃는 얼굴에 민혁은 저도 모르게 은광에게 다가갔었다. 제 눈에는 누구보다 아름다운 친구를 지켜주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들어서.
“어쨌든, 너 나 까먹으면 안 된다? 삼학년 때 다시 같은 반 되면 좋기야 하겠지만 그 때는 또 공부해야 되니까. 우리 남은 이 년도 잘 지내고 성인 되면 같이 놀러다니자! 술도 마시고, 어른의 세계도 즐기는 거지.”
“왜, 아예 같이 비디오방을 가자 그러지.”
“무슨 소리를. 그런 데는 애인이랑 가는 거야.”
“너 여친 생기면 꼭 그 말부터 해줘야겠다. 은광이는 비디오방 가려고 너랑 사귀는 거라고.”
어떤 영화보다도 냉혹한 곳은 현실이었으며 그 안에서마저 은광은 홀로 따스했다.
시간이 지나고 열여덟이라는 나이에, 또 열아홉에, 스물에 익숙해질 때쯤이면 너는, 그리고 나는 이 곳을 잊어가겠지. 함께했던 추억들이 기억 뒤로 조금씩 흐릿해지더라도 서로에게 서로가 무엇보다 소중했던 한때가 있었다는 것 정도는 기억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장난스러운 말에도, 의미없어보이던 단어 하나에도 널 향한 내 마음을 가득 담았다는 걸 시간이 지난 뒤에 어렴풋이라도 깨달았으면 좋겠다고. 1년 동안 저를 가슴 졸이게 만들었던 짝사랑을 이젠 정말 접기로 다짐하며 민혁은 그런 바람을 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