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TOB
학원물 합작
[식광] 사랑빛
w. 붙박이별
와아아- 남녀 가릴 것 없이 모두 우렁찬 함성을 뱉는다. 곳곳에선 여학생들이 저들의 심장을 부여잡고 쓰러질 듯한 리액션을 취하고 있다. 은현고등학교 축제의 1부 마지막을 화려하게 장식하고 무대 밑으로 내려오고 있는 현식이 그 원인이다.
잘생긴 외모, 젠틀한 성격에다가 은현고의 꽃이라 불리는 밴드부의 보컬을 맡고 있는 현식이기에 여학생들에겐 연예인 같은 존재나 다름없었다. 그렇다고 그를 질투하는 남학생들이 있는가? 그것도 아니다. 시원시원한 성격과 뛰어난 운동실력으로 발이 넓어 친구도 두루두루 사귀는 현식이다. 그뿐인가. 공부도 잘하는 편이라 한마디로 모든 걸 다 가진 이 시대의 진정한 완벽남이 현식이었다.
잠시 휴식 후 2부가 시작된다는 안내방송과 함께 학생들은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무대에서 내려오는 길이 있는 쪽으로 달려갔다. 무슨 연예인 퇴근길 보듯 주변에 모여서 '임현식' 이름 석 자를 외치는 학생들이다. 그리고 그 무리에 조심스레 끼여있는 은광.
은광을 한 마디로 정의하자면 '착한 모범생'이다. 평소 소심하고 얌전해서 이런 곳에 끼여있을 성격이 아니지만 그래도 현식과 꽤 친한 사이라 생각해서 다른 학생들을 따라오게 되었다.
"어, 은광 선배 맞죠? 저희 동아리에서 몇 번 봤는데, 기억 못...하시죠?"
"미안... 내가 사람 얼굴을 잘 기억 못 해서..."
"아니에요. 정 미안하시면 번호만 주고 가세요."
길거리에서 우연히 만나 이런 식으로 능글맞게 번호를 가져가길래 은광은 현식을 그저 장난꾸러기 후배라고만 생각했다. 그 후 연락을 자주 주고받고 학교에서도 자주 만났지만 세상 돌아가는 것에 무지한 은광이었기에 현식이 이렇게 대단한 존재인 줄 몰랐다.
방금 무대는 제가 봐도 정말 훌륭했다. 솔로 무대라는 것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풍부한 성량과 뒤지지 않는 기타 실력. 저도 모르게 빠져들었던 무대였다. 그래서 현식에게 잘했다고 한마디라도 해주고 싶어 학생들 무리에 끼였다.
그러나 다들 은광과 같은 생각을 하는지 끼여있던 은광의 몸이 점점 뒤로 밀려갔다. 현식의 친구들과 현식을 찬양하는 여학생들의 인파에 이리저리 밀려다니다 결국 뒤로 빠져나온 은광이다.
뒤에서 현식에 열광하는 수많은 학생들을 보고 있자니, 괜스레 씁쓸한 마음이 드는 은광이다. 나름 현식과 친한 사이라고 생각했다. 자신과 친한 사람을 꼽으라 했을 때 몇 안되는 사람 중 한 명이 현식이었다. 항상 자신을 보면 밝게 웃으며 인사해주고, 가만히 있는 저에게 먼저 다가와 말을 걸어주고, 제 표정 하나하나에 반응해주던 사람이 현식이다. 그래서 나름 가깝다고 생각했건만, 지금 와 보니 현식에게 저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는 은광이다.
현식이 제게 베풀던 호의가 왜 저만의 것이라 착각했을까. 괜스레 부끄러운 마음에 자리를 벗어나려 했으나 제 손목을 잡아오는 손길에 그럴 수 없었다.
"선배, 여기까지 왔으면서 왜 제 얼굴도 안 보고 가요?"
어느새 인파를 뚫고 저의 바로 뒤까지 와서 묻는 현식에 깜짝 놀란 은광이다. 주변에선 여학생들이 저와 현식을 빙 둘러싸고 박력 있다느니, 저 사람은 누구냐느니 난리도 아니다. 주목받기 싫어하는 은광이 얼른 자리를 빠져나가려 하자 현식도 눈치채고 특유의 눈웃음을 지으며 여학생들에게 비켜달라고 부탁했다.
축제가 열리던 체육관 밖으로 빠져나와 음악실로 향하는 현식이다. 은광은 손목을 붙잡힌 채 현식이 가는 방향대로 따라가는 수밖에 없었다. 음악실 문 앞에 다다르자 현식이 자연스럽게 비밀번호를 돌려 자물쇠를 따고 안으로 들어갔다. 늘 음악실에서 동아리 활동을 하는 은광과 현식에게는 익숙한 풍경이 비쳤다.
"뭐하러 여기까지 와. 바쁜데."
"선배가 저보러 와줬는데 조금이라도 보고 가야죠."
괜히 약간 퉁명스레 말하다가도 생글생글 웃는 현식에 아까 씁쓸했던 마음이 풀리는 은광이다. 그 마음을 표현하는 듯 살짝 웃어 보인 은광이 말했다.
"아까 진짜 잘하더라. 멋있었어."
"네?"
"어? 자...잘했다고..."
말해놓고 조금 부끄러워서 땅만 쳐다보고 있었는데 다시 되묻는 현식에 말을 더듬는 은광이다. 아 나 이런 말 잘 못하는 거 뻔히 알면서 왜 또 물어봐!
"선배한테 처음으로 듣는 칭찬이네요."
"아... 그랬나...?"
내가 그정도로 좋은 말을 안 해줬던가... 현식과 은광은 누가 봐도 너무 달랐다. 외향적이고 사람 사귀는 것을 좋아하는 현식. 그에 반해 내향적이고 낯을 많이 가려 정말 필요한 말만 하고 소수의 사람과 친하게 지내는 은광. 누가 더 좋다, 나쁘다 할 것 없이 그냥 다른 두 사람이다. 그 다름이 현식에게 혹시나 상처가 되었을까 봐 미안해지는 은광이다.
"아까 보니까 너 인기 되게 많더라. 왜 말 안 해줬어?"
"어? 전 나름 유명하다고 생각해서 선배가 알 줄 알았는데, 몰랐어요?"
그렇게 말하면서 나 실망했어요, 하는 표정을 짓는 현식에 풉-하고 웃는 은광이다. 저렇게 귀엽고 성격도 좋은데 인기 없는 게 더 이상한 게 맞긴 하지.
"아 선배. 저 2부 마지막에 밴드부 공연하는데, 어디 가지 말고 딱 앉아 있어야 돼요!"
"응? 아, 당연하지. 너 무댄데 봐야지."
자신의 말에 눈웃음으로 대답하는 현식을 보며 여자애들이 그 난리를 치는 이유 중에 하나가 저 눈웃음일 거란 생각을 한 은광이 먼저 문을 나섰다. 현식과 인사를 하고 헤어진 후 할 일이 없어진 은광은 고민하다 결국 다시 음악실로 들어갔다. 혼자 시간 때우기에는 여기가 딱이지.
혼자 피아노 앞에 앉아 선율을 그리며 노래를 부르면 그렇게 시간이 빨리 간다. 늘 현식이 왜 남들 앞에선 안 부르냐며 구박했던 저의 습관. 그러나 어쩌겠나, 남들 앞에서 부르긴 싫은걸. 그래서 처음 동아리에 들어오는 것도 많이 망설였지만 음악실 자유이용권을 준다는 말에 혹해버린 거다.
"그대 오직 그대만이
내 첫사랑 내 끝사랑
지금부터 달라질 수 없는 한 가지
그대만이 영원한 내 사랑"
저가 제일 좋아하는 노래. 딱히 사연이나 이유 같은 건 없다. 그냥 노래가 좋으니까. 동아리에서는 조용하게 할 것만 하다가 음악실에서 처음으로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며 제대로 불러본 노래도 이것이다. 그러다 현식에게 걸렸었지.
"으앗! 너 뭐야? 언제부터 있었어?"
"한참 전부터 있었는데요? 계속 불러줘요."
"안돼!"
"왜요? 목소리 좋은데."
"남들 앞에선 좀 그래."
"제가 남이에요? 그러지 말고 불러줘요."
결국 현식의 등쌀에 완창해주었다. 그 후로 현식 앞에서만 노래를 했다. 그 아무에게도 들려주지 않았던 노래들. 현식은 들을 때마다 좋다며 칭찬을 해줬고, 그 칭찬이 듣고 싶어 불렀던 걸지도 모른다.
문득 현식이 방금 제게 했던 말이 생각났다. 나도 칭찬 좀 해줄 걸 그랬나. 별별 생각을 하다 틀려버린 음정에 안타까워하며 다시 노래에 집중하는 은광이다.
그렇게 노래에 심취해 있다가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시간이 훌쩍 지나있었다. 깜짝 놀라 얼른 피아노 뚜껑을 덮고 나서는 은광이다. 제발 안 늦었기를 바라며.
서둘러 체육관에 들어오니 다행히 밴드부 무대를 위해 악기들을 설치하는 중이었다. 다행이다, 가쁜 숨을 내쉬며 제자리에 앉는 은광이다.
곧 터질듯한 함성이 들리고 현식과 밴드부 학생들이 무대로 올라왔다. 여기저기서 언제 준비해왔는지 모를 플랜카드도 올라온다. 은광은 그런 것엔 관심 없는 듯 현식만 바라보았다. 그러다, 눈이 마주쳤다. 순간 놀라 고개를 숙이니 현식이 갑자기 마이크를 잡고는 말했다.
"어디 봐요. 나 안 보고."
여학생들이 자지러지는 소리를 냈다. 지금도 충분히 보고 있다며 소리를 질렀다. 그것이 다른 의미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은광밖에 없는 듯했다. 조심스레 고개를 들어 현식을 보자 씩 웃고는 노래를 시작한다.
"그댈 보면 얼굴이 빨개지고
그댈 보면 가슴이 두근두근
아이처럼 수줍게 말하고
그댈 보면 괜시리 웃음이 나
바보처럼 자꾸만 그래
아마 내게 사랑이 온 건 가봐"
노래를 부르는 도중에도 절대 은광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는 현식이다. 오로지 한 곳, 은광이 앉은 곳만을 바라보며 노래하는 현식에 은광이 의아해했다. 긴장한 건가...?
"그대가 원하는 건 다
너를 사랑하니까
내 사랑에 이유는 너잖아 You know"
가사에 맞춰 손가락으로 '너'를 가리키는 현식이다. 그리고 그 끝엔 은광이 있었다. 현식은 긴장한 게 아니다. 정말로 은광 하나만을 바라보고 노래하고 있었다. 마치 은광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는 듯.
"그대는 Darling
밤 하늘 별빛보다 아름다워요
내 맘속 깊은 곳에서 반짝거리는
나 만의 사랑 빛"
은광의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생각해보면 현식이 사람들에게 호의를 베푸는 건 맞지만 저에게 했던 행동들은 그것과는 달랐다. 항상 필요하다면 달려와주고, 늘 시간만 있으면 저에게 찾아와 노래해달라고 했던 현식의 모습이 눈앞에 스쳤다. 그리고, 그 생각은 현식의 마지막 가사로 확실해졌다.
그댄 나의 사랑 빛
*번외
"형 미안해요. 많이 기다렸어요?"
"아니야, 나도 방금 왔어."
"거짓말. 손 빨간데?"
"아니래도."
그래놓고는 부끄러운지 먼저 걸어가버리는 은광이다. 그래 봤자 내가 걸음 더 빠른데? 현식이 얼른 뛰어가 은광의 손을 잡는다.
"아 깜짝이야."
"형은 왜 제가 뒤에서 이렇게 손만 잡으면 놀라요?"
"내가 또 언제?"
"제가 고백했던 날 있잖아요. 축제 때."
그런 부끄러운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현식에 오히려 더 당황한 건 은광이었다. 그날 일이 생각나는지 얼굴이 빨개지는 은광이다.
그 후에 앵콜곡까지 현식은 오로지 은광의 눈만을 바라보며 노래를 끝냈다. 그러고는 무대에서 내려와 바로 은광을 찾아 다시 음악실로 데려갔다지. 그곳에서 정식으로 고백을 하고 둘은 연인이 되었다.
"저 그때 얼마나 떨렸는지 알아요? 무대 준비는 끝나가는데 형은 안 보이고. 형이 저 싫어서 도망간 줄 알았어요."
"도망은 무슨..."
"전 처음에 형이 저 싫어하는 줄 알았다니까요. 고백할 때까지도 얼마나 긴장했는지 알아요?"
"아... 그랬나. 미안해."
"미안하긴 뭘 또 미안해요."
그러면서 팔짱을 껴오는 현식이다. 야야 사람들 있는데 부끄럽잖아. 무슨 상관이에요 형은 내 건데. 그러면서 씩 웃어 보인다. 아 저 눈웃음에다 대고 뭐라 할 수도 없고.
"근데 형은 왜 안 물어봐요?"
"뭘?"
"보통 사귀면 궁금해서 한 번쯤 물어보지 않나? 제가 왜 형을 좋아하는지 안 궁금해요?"
안 궁금하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 그렇지만 부끄럽기도 하고, 현식이 저를 사랑해주는 게 보이는데 굳이 그런 걸 물어야 할 필요성도 못 느꼈던 은광이다.
"왜 말이 없어요? 진짜 안 궁금해요?"
"궁금해."
이왕 현식이 말을 꺼냈으니 한 번 들어보고 싶어진 은광이 짧게 대답했다.
"그럼 내가 말해주면 형도 말해줘요."
"에엥? 그럼 싫어!"
"아 뭐예요!! 그럼 나도 말 안 할래요!"
"그러든가!"
새침하게 총총 걸어가버리는 은광의 뒷모습을 보며 현식이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은광은 모르겠지만, 은광이 피아노를 치며 끝사랑을 부르던 그때, 현식은 은광의 노래를 처음 듣는 것이 아니었다. 은광은 언제나 밥을 일찍 먹고 음악실에 먼저 가 있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습관적으로 조용히 노래를 읊었던 것이다. 그리고 현식은 항상 살짝 문을 열어놓고 은광의 모습과 노래를 눈과 귀에 담고 있었다.
순수한 모습과 목소리에 심취해서 노래를 듣다 보면 다른 동아리 부원들이 오는 모습이 보였다. 항상 시간이 부족해 끝까지 노래를 듣지 못하는 것이 너무 아쉬웠지만 그렇게라도 은광의 노래를 듣는 것이 좋았다.
그리고 조금 지나서였을까, 은광을 길에서 만난 것이다. 물론 그것도 현식이 아예 의도하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은광의 집이 어딘지는 명부를 보고 알게 되었고, 일부로 그쪽으로 좀 지나다녔으니까. 실제로 얘기를 나눠본 은광은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도 더 순수하고, 고운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매력에 퐁당 빠져버렸다.
더군다나 은광이 자신의 화려한 모습을 모른다는 것이 더 좋았다. 남들은 무대 위의 화려한 임현식을 좋아하지만, 은광은 그냥 있는 그대로의 임현식을 보고 웃어주고 반가워해주었다. 그렇기에 은광과 함께 있는 시간은 편안하고 마치 구름 위에 온 것 같이 포근했다.
나만의 사랑빛. 언제나 내 곁에서 빛을 내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