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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민] 타이밍

 

w. 붙박이별

 

 


흐익!!

 

이상한 소릴 내며 흐뜨러진 몸의 균형을 겨우 바로잡았다. 와 죽을뻔했네.

 

그러니까 이게 무슨상황이냐면, 나는 지금 선생님의 심부름을 받아서 4층학생부로 올라가고 있었다. 3층 계단 끝에 다다랐을 때 갑자기 엄청 빠른 뭔가가 나를 박으려고했다, 이거다.

 

"죄송합니다!"

 

정신을 차리고 겨우 앞을 살피니 나랑 부딪힐뻔 했던 놈이 급히 사과를 하고는 다시 빠른 속도로 계단을 내려간다. 서너 칸씩 가볍게 뛰어내려가는데 또 사고칠까봐 겁난다.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내 눈높이가 그 놈 가슴팍 정도라서 이름표가 분홍색인 것 하나는 확실하게 보았다.언제부터1학년이 학교에서 저렇게 펄쩍펄쩍 뛰어나녀도 되는 존재였지?

 

-

 

종례가 끝나고 다른 친구들은 다 집으로, 또는 학원을 간다며 건물을 빠져나갔지만 나는 총총총 5층 시청각실로 향했다.

 

내가 평소같으면 총총총 이런 표현이 나오게 걷지 않았을 테지만 지금은 기분이 좋아서 발랄하게 걷고 있다.

 

내가 그토록 들어가고 싶어하던 동아리에 합격했기 때문!!!! 그리고 지금은 그 동아리 첫 모임을 하러 가는 길이다. 방과후에 모임이 싫을법도 했지만 내가 너무나 원하던 동아리여서 그런건 따지지 않기로 했다.

 

"안녕하세요!"

 

시청각실 문을 열고 나름 해맑은 웃음으로 인사하고 맨 앞줄에 가서 앉았다. 다들 맨앞줄은 부담스러웠는지 텅텅 비어있다.

 

첫모임이니만큼 이름과 얼굴을 익힐겸 출석체크를 한단다. 내 이름에 대답하고 별생각없이 앉아있는데 동아리장 선배 목소리가 커진다.

 

"육성재!!! 육성재 안왔어?"

 

첫날부터 지각인가보다. 뭐, 운안좋게 늦게 마쳐주는 담임을 만났다거나 한다면 지각이야 불가피한 것이라는 걸 다들 아는지 딱히 신경쓰지 않는듯 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와우 타이밍 좋네. 출석체크가 끝나자마자 헐레벌떡 뛰어들어온 저놈이 육성재인가보다. 헥헥 숨을 몰아쉬더니 맨앞줄로 와서 내 옆자리에 털썩 앉았다. 아니 널린게 빈자린데 왜 내 옆자리에 앉는건지. 낯을 많이 가리는 나로써는 달갑지 않는 행동이었기에 고개를 돌리려는 찰나,

 

"아깐 죄송했어요..."

 

으잉? 이건 또 무슨 상황이지? 처음 보는 놈한테 죄송하단 소리를 듣는 황당한 상황에 빠져있던 나는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제스쳐를 취했다.

 

"아까 계단에서..."

 

아 네놈이 그놈이구나. 하도 급하게 뛰어가서 얼굴도 못봤다.

 

"괜찮아. 안 다쳤잖아."

 

그러자 육성재가 멋쩍은듯 뒷머리를 만지며 다시 한번 사과했다. 방금도 급하게 뛰었는지 아직도 숨이 불규칙적이다.

 

"왜 맨날 뛰어다녀. 여유롭게 살아."

 

속으로만 하려던 생각을 아무생각없이 말로 내뱉아버렸다. 아 이 멍청이...

 

"그러게요"

 

라며 녀석이 샐샐 웃는다. 웃는게 퍽 예쁜 상이다.

 

-

 

그 이후로 육성재 이녀석이 유난히 눈에 많이 띄었다. 체육시간에 두 반이 운동장을 같이 쓰는데 그게 우리반과 육성재 반이었고, 하나밖에 다니지않는 학원에 가도 가끔 복도에서 친구들과 장난치는 육성재를 볼 수 있었다. 더군다나 이 녀석 반장이었는지 전교회의를 갔을 때에도 떡하니 앉아있어서 놀랬다.

 

서로 보기는 보지만 인사하기엔 아직 애매한 사이인데다가 주변에 사람들도 많아서 그냥 서로 눈치만 보고 지나쳤다. 좀 어색하긴 했는데 어쩌겠나 싶어서 내버려뒀는데

 

"안녕하세요 선배"

 

지금은 너무 정면으로 딱 마주쳐 버렸다. 피해가는게 더 어색할 정도로. 인사를 건넬까말까 1초동안 수십번도 더 고민하고 있었는데 육성재가 먼저 인사를 건네왔다.

 

"어..안녕"

 

약간 어색하게 인사를 받고 지나쳐가려고 했다. 내 손목을 덥석 잡아오는 육성재만 아니었어도. 이 자식 어린놈이 이런건 또 어디서 배웠는지 박력있게 내 몸을 돌려세웠다.

 

"번호...좀 주세요..."

 

아까의 박력은 어디갔는지 이젠 쭈굴하게 번호좀 달란다. 그 모습이 귀여워서 풉 웃으면서 알았다고 했더니 환하게 웃으면서 핸드폰을 건넨다. 지난번에도 느꼈지만 이 녀석, 웃는게 참 예쁘다.

 

-

 

집에 와서 아무 생각 없이 핸드폰을 열었는데 문자가 세통이나 와있었다. 연락이라는 것 자체를 귀찮아하는 나라서 친구들도 그걸 아는지 급할 때를 제외하고는연락을 하지않는다. 그런데 세 통이나 와있다니. 누군가 싶어 잠금을 풀었는데

 

[선배 선배]

 

[저 성재예요!]

 

[으잉 바쁘세요?]

 

모두 육성재가 보낸 문자였다. 마지막 문자가 조금 귀여워서 친구들이 그렇게 귀하게 여기는 답장을 해주었다.

 

[안 바빠ㅎㅎ 단지 폰을 잘 안봐서...]

 

답장을 보낸지 얼마 되지 않아 문자가 온다.

 

[아항 그렇구나. 선배 지금 문자할 수 있어요?]

 

딱히 공부할 마음도 없었거니와 마침 잠도안왔던터라 된다고 답장을 보냈다. 녀석은 기뻐하면서 시시콜콜한 이야기부터 시작하였다.

 

[선배 어디사세요?]

 

[큐브아파트]

 

[어 저도 거기 사는데! 몇 동이신데요?]

 

호구조사하냐. 그래도 가까이 산다는 사실에 나도 조금은 기뻤다. 아는 선배는 몇명 있었지만 아는 후배는 단 한명도 없었던 나한테 친하게 지낼 수 있는 후배가 생겼다는 게. 그리고 더군다나 가까이 살면 더 자주볼 수 있으니까.

 

그 이후에 무슨 얘기를 했는지 기억에 특별히 남는 건 없었다. 일상적이고 소소한 그런 이야기들. 즐겁게 문자를 주고받다보니 벌써 3시간이나 지나있었다. 원래 문자보다 얼굴을 보면서 얘기하는 것을 좋아하던 나였는데, 이것도 크게 나쁘진 않은 것 같다.

 

오늘 문자를 하면서 육성재에 대해 몇가지 사실을 알게 되었다. 위에서 말했듯이 나랑 가까운 곳에 산다는거, 기타를 칠 줄 안다는거, 내가 예상했던대로 반장이라는 거, 가족관계 등등 정말 사소한 것들. 정말 사소한 것들이지만 왠지 모르게 즐거워지는 기분이었다.


-

 

항상 학교에서 처음 본 날처럼 뛰어다니는 녀석이라 한번쯤은 보일 줄 알았는데 오늘은 머리카락도 안보인다. 체육도 안들었고. 왠지 모르겠지만 조금 아쉬운 감정이 들었다.

 

그렇게 녀석을 만나기 전과 같은 일상을 보내고 학원에 가기 위해 아파트 단지를 걷고 있었는데, 저 멀리서 걸어오는 게 꼭 육성재 같은 기분이 들었다.

 

기분이 아니라 진짜였군. 뭐가 그리 재밌는지 폰에서 시선을 떼질 않는다. 어차피 나랑 같은 투지폰이면서 할게 뭐가 있다고 저렇게 앞도 안보고 걷는지 모르겠다.

 

거리가 가까워지고, 여전히 고개를 들지 않는 녀석에 이번엔 내가 먼저 조심스레 인사를 건넸다.

 

"안녕."

 

"어, 형! 어디 가는 길이에요?"

 

"나 영어 학원. 너는 어디 갔다 오는 길이야?"

 

"저 권투 학원이요. 그래서 지금 꼴이 좀..."

 

말을 듣고 자세히 보니 땀도 많이 흘린것 같고 옷은 편한 체육복 차림이었다. 내가 계속 훑어보고 있자 불편했는지 대화를 마무리하며 뛰어가버린다.

 

오늘은 못볼 줄 알았는데, 짧은 시간이었지만 뭔가 묘하게 기분이 좋아진다.

 

-

 

하루 일과를 모두 마친 나에게 드디어 꿀 같은 자유시간이 찾아왔다. 냉큼 컴퓨터를 키고 페이스북에 들어갔다.

 

오랜만에 들어갔더니 볼 게시물들이 어마어마하게 밀려있었다. 괜히 그걸 보니까 갑자기 하고 싶은 마음이 없어져 창을 닫으려다 친구신청에 육성재 떠있는 것을 보고 멈췄다.

 

아무래도 다른 학년이다보니 그때 문자로 직접 들은것밖엔 아는 게 없었다. 페북이라도 보면 좀 더 많은 것을 알 수 있을 것 같아서 친구신청을 받고 타임라인을 내리며 읽어보았다.

 

시작한지 얼마 안되었는지 게시물이 많이 없었다. 그런데 유독 내 눈길을 끄는 게시물이 있었다. 바로 3시간 전에, 그러니까 내가 육성재를 만나고 그 녀석이 그 길로 집에 가서 올린듯한 게시물이었다.

 

[오늘은 타이밍이 좋은 날]

 

다시 생각해보면 남자애가 쓴 거 치고 감성적이고 소녀소녀한 느낌의 글이었지만 나는 그게 중요하지 않았다. 육성재가 말하는 좋은 타이밍이 무엇일까.

 

아닌 걸 머리는 알지만 자꾸 마음이 다른 쪽으로 간다. 저기서 좋은 타이밍이란게, '오늘 집에 가는 길에 민혁이 형을 만난 것' 을 표현한 것이었으면 좋겠다고.

 

아니야,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댔어. 기대하지 말자. 내 인생의 좌우명 같은 말을 생각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리고 내가 얘가 무슨 글을 올리든 말든 무슨 상관이라고. 그 글은 마음에서 지우기로 했다.

 

-

 

난 일주일에 3일을 학원에 가는데 오늘이 하필 그날이다. 가기 싫은 몸을 억지로 이끌고 학원에 가서 수업을 듣긴 했지만 기억이 나지않는 신기한 경험을 하고 집에 돌아가기 위해 계단을 내려가는데,

 

"민혁이 형!"

 

어디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알게 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난 아직 조금 어색한데 얘는 워낙에 싹싹하고 능글(?)맞아 그런지 조금의 거리낌도 없이 내게 다가왔다. 그리고 다음 육성재의 말에 나는 그 자리에 우뚝 설 수 밖에 없었다.

 

"오늘도 타이밍이 좋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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