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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섭] 이른 봄

 

w. 김마말

 

새학기가 시작되고 지루한 학교의 생활이 또 반복이었다. 그래도 조금은 특별한 느낌이었다. 옆자리의 짝지 때문일까. 친한 친구라곤 정일훈밖에 없었던 나에게는 짝은 조금 오지랖이 넓다고 생각 되었다. 그래도 작년부터 간간히 눈여겨 보던 아이라 그런지 크게 반감은 없었다. 수업이 지루해서 문득 내려본 운동장에서 그늘에 앉아 아이들이 축구 하는 것을 지켜보기만 하던 아이였다. 그래도 맑은 목소리로 그들을 응원하던 아이는 꽤나 신선했다. 햇빛을 본래 싫어하던 아이인지 까무잡잡한 나와는 달리 이창섭의 하얀 피부는 하얗다 못해 투명했던 것 같다. 이름과 이미지가 비슷하기도 했다. 아이들이 항상 부르고 다니는 이름, 이창섭. 멍해보이는 이창섭은 항상 예쁨을 받으며 주위에 사람들을 달고 다녔다. 이창섭을 유심히 지켜보다가 입가에 그 아이의 이름을 조심히 담아보던 작년이었다. 이창섭 때문인지는 몰라도, 조금은 설레는 새학기가 될 것 같았다.


옆에 앉아있으면 유난히 아기 냄새가 났다. 남고라 땀내가 나기 마련인데, 이창섭은 조금 달랐다. 피부처럼 투명한 느낌이랄까. 그래, 맑았다. 짝지가 된 후 얼마 안 되었을 때, 나는 수업 중에 잠을 잤고, 잠에 빠지기 직전에 이창섭과 눈이 마주친 것 같았다. 이창섭의 미소를 얼핏 본 것 같았다. 눈이 감겼고, 다시 눈을 떴을 때에는 햇빛이 나를 괴롭히고 있었다. 그리고 햇빛 사이로 이창섭의 모습이 보였다. 나를 보고 웃던 이창섭의 미소는··· 빛 같았다. 햇빛보다 따스하고 밝은 빛···. 왠지 모를 두근거림에 눈을 두어번 깜빡였다.

 

“이제 일어나, 다음 시간 담임이야.”

“···응.”

 

속삭이는 목소리가 가슴을 간지럽혔다. 어쩐지 달큰한 목소리를 들으니 노래를 하면 참 잘 어울리겠다 싶었다. 어느새부턴가 내 시선은, 너에게로 향해 있었다. 너는 가끔 나와 눈을 맞췄다. 이창섭, 입에 담긴 이름이 참··· 달콤했다.


*


새학기가 되고 여전히 많은 아이들 사이에 끼어있는 나는 밋밋했다. 이번에도 같을 거라는 그런 지루함을 느끼다가 마주친게 나의 짝이었다. 날 계속해서 쳐다보는 아이였다. 추운 겨울이 지나고 천천히 다가오는 봄처럼 따뜻한 분위기의 아이. 그 아이는 모르겠지만 나는 이미 그 아이를 알고 있었다. 추운 겨울 길을 지나다 공연 중인 카페를 언뜻 쳐다보다가 노래에 빠진, 그러니까··· 추운 겨울을 녹이는 것 같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열심히 노래를 부르고 있는 그 아이를 보았다. 아이는 악기를 연주하는 것만 있었다. 길 한복판에 서서 멍청한 눈빛으로 그 아이를 쳐다보던 나는 목도리에 내 더운 숨을 뱉으며 카페 안으로 들어섰다. 임현식, 그 아이의 여유로움이 내게 밀려왔다. 그리고 나는 밀려온 그 여유로움을 한 가득 끌어안았다. 끌림, 단순했다.


시선이 느껴져서 뒤를 돌면 항상 너와 눈이 마주쳤었다. 기다려야지, 그 애가 먼저 말을 걸 때까지. 임현식은 생각보다 가볍지 않았다. 하얗고 말랑 거린다는 이유로 짖궂게 말 장난을 걸지도 않았고, 격한 몸짓으로 나를 끌어안지도 않았다. 그냥, 사람들 사이의 나를 묵묵히 바라보고 있었던 것 같다. 실은 당장이라도 달려가서 너의 노래를 정말 좋아한다고 외치고 싶었다. 임현식은 깊은 눈동자로 나를 주시하기만 해서, 혹시나 미움을 받는 걸까 그냥 고개를 돌리기만 했다. 물론 지금은 아니다. 짝지니까, 나는 임현식의 그 여유로움을 본 받아 천천히 다가가기로 했다.

 

[왜 자꾸 쳐다 보는 거야?]

[어··· 불편했어?]

[아니! 그냥, 물어보는 거야!]

[맑아서.]

 

쪽지로 내가 맑다고 하던 임현식은 턱을 괴고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나는 귀가 달아오름에 고개를 숙였고 너는 곧 노트를 찢어 내게 쪽지를 건넸다. 빛 같았어. 그 짤막한 한 문장에 미소가 절로 나왔다. 설렘이 밀려왔다.

 

“이창섭! 임현식! 너네 연애하냐?”

“모르는 거 물어봤어요. 이 정도로 그 소리 하는 거 중증 아녜요?”

 

와하하, 하고 반 아이들의 웃음이 쏟아져 나왔다. 선생님의 짖궂은 농담에 너와 나는 반 아이들과 함께 웃으며 선생님을 질타했다. 기분이 나쁘질 않았다. 빛 같다던 현식이나, 연애하냐던 선생님이나. 오히려 약간 기쁘기도 했다.


*


현식과 창섭은 자연스레, 그리고 아주 천천히 서로에게 물들었다. 둘만이 가지는 시간이 많아지고, 공통점인 음악을 알게 되며 현식을 만난 계기까지 털어 놓게 된 둘의 사이는 친구 이상으로 가까웠다. 창섭은 미지근하게 불어오는 바람이 반가웠다. 봄의 징조. 현식에게 선물을 하고 싶었다. 인정 받기 위함이 아닌, 너의 노래를 좋아한다는 의미로. 창섭은 현식이 카페에서 불렀던 노래를 피아노까지 쳐가며 열심히 연습했다. 현식에게 보여줄 날이 왔고 창섭은 평소보다 더욱 들 뜬 모습으로 현식을 음악실로 끌고 왔다. 영문도 모르고 따라온 현식은 가쁜 숨을 골랐고, 창섭은 바로 피아노 의자에 앉았다.


첫 음을 뗀 창섭의 머리가 살랑 하고 흔들렸다. 현식은 멍하니 그를 보았다. 창섭의 노래가 끝나갈 즈음에 현식은 그의 노래에 화음을 넣었다. 창섭은 맑게 미소를 지었다. 커튼 사이로 비치는 햇빛처럼, 은은하게 흐르는 창섭의 노래가 끝이 나고 현식이 박수를 쳤다. 현식을 보며 히히, 하고 웃는 모습이 너무 예뻐서, 현식은 나즈막히 읊었다.

 

“좋아해.”

“···나 남잔데?”

“응, 근데 널 좋아해.”

“···나, 나도 너 좋아해!”

 

현식과 눈을 맞춘 창섭이 결국 현식을 따라 고백을 해버린 입을 턱 막았다. 현식이 입꼬리를 올려서 예쁘게 웃었다. 손을 내미는 현식을 따라 손을 맞잡은 창섭도 붉어진 볼을 달래며 뛰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마치 세상을 가진 듯한 미소들이었다. 이제 봄이 오는가 싶었다. 봄햇살은 창섭만큼 밝을 것이고 봄바람은 현식만큼 따스히 불어 올 것이다. 봄내음이 저 멀리서 났다.


**


그리고 너와 나에게는 누구보다 이르게 봄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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