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TOB
학원물 합작
장마 w. 투모
#1
사회, 그게 학교든, 직장이든, 어느 곳이든 언제나 소외되는 소수는 존재한다. 그리고 그 소수의 소외된 이들은 다수에게 괄시 받기 십상이며 여러 부당한 대우를 받게 된다. 은광의 집안은 그가 태어났을 때부터, 아니 그전부터 가난에 시달렸고 그래서 이사를 할 수도, 전학을 갈 수도 없었다. 유난히 빈익빈 부익부가 심했던 곳, 달동네와 도로 하나를 두고 자리 잡은 호화로운 아파트들은 달동네 사람들에게 위협을 주기에 충분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일어나는 재개발 반대 시위 등으로 은광의 집은 바람잘 날이 없는데 맞은편 사람들은 너무나 고요하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고 있으니 이보다 더 열이 받을 수는 없었다. 은광은 다짐했다. 꼭 어머니를 데리고 이 지긋지긋한 동네를 빠져나오겠다고. 보란듯이 남부럽지 않게 살아가겠다고.
초등학교까지는 나름대로 순탄한 학교생활을 이어나갔다. 그런데 중학교를 들어가게 되면서 은광의 인생이 꼬이게 됐다. 가난하다는 이유로 반에서 따돌림을 받게 되었고 그 상태 그대로 고등학교에 들어가자 괴롭힘의 범위가 해를 거듭할 수록 점점 커져만 갔다. 내로라하는 좀 사는 애들이 은광에게 온갖 폭언을 아끼지 않았고, 그럴 때마다 은광은 귀를 닫고 오로지 교과서, 공부에만 의지했다. 사실 이렇게 공부한다고 달라지는 건 없었다. 그러나 이 교실에서 은광이 할 수 있는 건 공부 외엔 아무것도 없었다. 그게 은광의 유일한 도피 거리였다. 3년, 딱 3년만 참고 살자. 은광이 고등학교에 들어온 후 버릇처럼 항상 되뇌는 말이었다.
"야, 야."
"...."
"야, 대답 안 하냐?"
누군가가 은광의 이마 언저리를 검지로 툭툭 밀면서 시비를 걸었다. 은광이 안경을 고쳐 쓰고 상대방을 쳐다봤다. 육성재였다. 오직 은광이 가난하다는 이유 하나로 은광을 깔보곤 하는 놈이었다. 정일훈과 친하다는 명분 하에 누구든지 가리지 않고 시비를 걸고 다녔다. 은광은 그런 성재가 굉장히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의 배후가 더 두려웠기에 말없이 성재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부르면 대답을 해야 할 것 아니야."
"...."
"눈빛 봐라, 이러다가 한 대 치겠다?"
은광이 주먹을 꽉 쥐며 떨었다. 일부러 은광을 도발하듯 비죽거리는 성재를 그의 말대로 한 대 치고만 싶었다. 하지만 어느새 은광에게로 집중되어 있는 여러 시선들이 부담스러워 다시 눈을 내리고 책상 위의 교과서만 바라보았다. 교과서는 반복해서 필기한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었고 하도 넘기고 넘겨 헤질 대로 헤져있었다.
"야, 이 새끼 무시하네? 어?"
그 말을 기점으로 주변에서 낄낄거리던 놈들이 매섭게 다가왔다. 은광은 신경 쓰지 않겠다는 듯 조소들을 무시하고 책을 바라보았다. 순간, 뒷덜미가 붙잡히더니 뒤로 밀쳐지며 사물함에 강하게 부딪혔다. 허리가 너무 아파 인상이 절로 찌푸려졌다. 그러나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은광은 머리채가 잡혀 어디론가 질질 끌려갔다.
"이 새끼가, 사람이, 말을 하면, 좀 들어야 할 거 아냐?"
도착한 곳은 건물 옥상이었다. 은광은 무차별적으로 맞았다. 무리들은 행여나 교복이 더러워질까 체육복으로 교복을 덮고, 그것도 모자라 옷으로 가려질 부분들만 교묘하게 때렸다. 선생님이 알게 된다면 일이 피곤해질 게 뻔했으니까. 은광은 이를 악물고 제 팔로 머리를 감싸 폭행을 견뎌 냈다.
그렇게 한참을 맞았을까, 점심시간이 끝나는 종소리가 들려 옴과 동시에 은광의 몸에서 수많은 발들이 거둬졌다. 성재는 은광의 얼굴에 침을 한 번 퉤하고 뱉었다.
"니 처지 알면 앞으론 좀 설설 기는 맛도 있고 해라. 봐줄 때 알아들어."
그들끼리 담배를 꺼내 하나씩 나눠 피고는 담배꽁초를 은광의 몸 위로 버렸다. 그리곤 낄낄거리며 유유히 옥상을 빠져나갔다.
세상이 조용했다. 은광은 그 자리에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누워 있었다. 체육복을 치워 버리고 교복을 살짝 들어봤다. 아까 배를 걷어 차였는데, 아니나 다를까 그 자리에 울긋불긋한 멍이 자리하고 있었다. 뼈가 부러지지 않아 차라리 다행인가. 은광은 작게 신음을 흘리며 자리에 일어나 앉았다.
입안에 고인 침을 바닥에 뱉은 은광이 다시 드러누웠다. 구름 한 점없는 하늘이 보였다. 옥상에서 바라보는 하늘은 너무나 맑고, 예뻤다. 은광은 이 자리에서 그냥 죽어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혼자 남으실 어머니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다. 식당 주방에서 설거지를 하시느라 많이 거칠어진 어머니의 손이 문득 생각났다. 눈에 눈물이 살짝 맺혔다.
#2
그날도 매한가지로 흠씬 두들겨 맞았다. 이번에는 입술이라도 터진 모양인지 입에 고여 있던 침에 피가 섞여있었다. 은광이 손등으로 대충 입가의 피를 닦아냈다. 하늘은 역시 푸르고 깨끗했다. 지문이 묻어 더러워진 안경을 벗어냈다.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다 이 하늘, 이 세상이 원망스러워졌다. 내가 무얼 잘못해서, 왜 가난하게 태어나서, 왜 이런 수모를 당하는 걸까. 은광은 허공에 대고 소리라도 지르려다 이내 말았다. 이런다고 달라지는 게 뭐가 있겠는가. 하늘은 예뻤다. 눈물이 날 정도로.
한창 하늘 감상에 젖어있던 찰나, 그림자 하나가 은광의 시야를 가렸다.
정일훈이었다. 은광이 놀라서 커진 눈으로 일훈을 올려봤다. 그리고 순간적으로 벌떡 일어났다가 뒤늦게 느껴지는 통증에 배를 움켜쥐었다. 일훈은 겁에 질린 은광을 뒤로한 채 익숙하게 담배를 꺼내 하나 물고는 또 하나를 꺼내 은광의 입에 물려주었다. 은광이 의아한 눈빛으로 쳐다봤지만 말없이 라이터를 꺼내 담배에 불을 붙이더니 담배의 불씨를 은광에게 옮겨주었다.
은광은 얼떨결에 담배를 입에 물게 되었다. 처음으로 피게 된 담배에 적응을 하지 못하고 한 번 들이마셨다가 심하게 기침을 했다. 기침으로 인해 배의 통증이 더 심해져 인상을 더 찌푸렸다.
"아까 작살나게 얻어터지던데."
"....."
"아, 걔네랑 같이 올라왔던 건 아니고. 저기 뒤에서 숨어서 땡땡이치고 있는데 육성재가 네 머리채 잡고 등장을 하더라고. 덕분에 좋은 구경 좀 했지. 제일 재밌는 구경이 불구경이랑 싸움 구경이라 하잖냐."
싸움이라니, 이게 싸움이었다면 억울하지나 않았다. 은광은 말문이 막혀 말없이 담배를 입에 물고만 있었다. 담뱃재가 은광의 교복 바지 위로 툭하고 떨어졌다.
"야, 펴. 존나 아깝게."
"아..."
은광은 다시 기침을 하며 겨우 담배를 피워냈다. 들이마실수록 적응이 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여전히 읽을 수 없는 그의 속 때문에 은광은 눈치만 살폈다. 일훈이 침이 뱉어진 자리를 피해 은광의 옆에 드러누웠다.
"야."
"어?"
"왜 맨날 육성재 도발에 멍청이처럼 대답도 안 하고 가만히 있냐? 난 너 처음에 벙어린 줄 알았다."
"말해봤자 달라지는 것도 없잖아."
"최소한 이렇게 처맞지는 않았겠지."
은광이 뒤로 돌아 일훈을 한 번 슥 쳐다봤다.
"그러는 넌 왜 나 안 도와주는데?"
"뭐가?"
"그렇게 오지랖 떨 거면, 그냥 나한테 이래라저래라 하지 말고 걔네한테 나 그만 때리라고 말할 수도 있는 거잖아."
"내가 왜?"
"어?"
"내가 왜 그래야 하냐고."
사실 맞는 말이다. 일훈이 저를 도와줄 의무는 전혀 없었다. 하지만 은광을 도와줄 것도 아니면서 자신에게 왜 말을 안 하나 어쩌고 하는 일훈이 영 마음에 안 들었다. 더군다나 지금 이렇게 은광과 같이 옥상에 누워 뭘 하자는 건지, 일훈의 의도를 전혀 파악할 수 없었다.
"나 갈게."
"어딜?"
"수업 가야지."
"더 있다가 가. 어차피 수업 시작해서 너나 나나 무단이탈됐는데, 뭐."
"...."
일훈이 말을 무시하고 일어나려 하는 은광의 팔을 세게 잡아 앉혔다. 엉덩이에도 멍이 들었던 모양인지 은광이 고통에 가득 찬 비명을 내질렀다. 미안한 기색이 전혀 보이지 않는 일훈이 다시 은광을 잡아당겨 제 옆에 눕혔다. 은광이 인상을 팍 쓰며 일훈의 옆모습을 노려보았다. 일훈은 나른한 표정으로 전깃줄의 새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눈이 참 예뻤다. 한참 동안 일훈의 눈을 구경하고 있었다. 갑자기 일훈이 말을 내뱉었다.
"내가 도와주면?"
"뭐?"
"네 말대로 내가 도와주면 넌 나한테 뭐 해 줄 건데?"
일훈의 입에서 나온 말은 꽤 의외였다. 스스로의 힘으로 다수의 폭력을 이겨낸다는 건 사실상 불가능했다. 그런데 이 먹이사슬의 최상위 포식자가 저를 도와준다니,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쪽이 더 가망성이 있었다. 은광이 열심히 머리를 굴려댔다. 성재를 두고 굳이 저를 도와주겠다는 의도를 전혀 파악할 수가 없었다. 성재는 꽤 있는 집의 아들이었지만 은광은 그저 가난뱅이일 뿐인데, 누가 봐도 일훈에게 유리한 관계는 성재였다.
"왜? 왜 도와주려고 하는데?"
"도와주는데 이유도 필요하나?"
"나 도와준다고 괜히 나섰다가 육성재가 적이라도 되면 너 어쩔 건데?"
"흐음... 그럴 일은 없을 것 같은데."
반박할 수 없었다. 성재의 아버지는 일훈의 아버지 아래서 일하고 있었다. 서열을 물려받듯 성재는 일훈의 발밑에서 설설 기며 지냈다. 그러나 일훈은 부모의 권력을 떠나 정일훈 그 자체로도 충분히 위압적이었다. 은광은 그저 먼지에 불과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굳이 이유와 명분을 갖다 붙이자면 불쌍한 동급생 구출 정도?"
"원하는 게 뭔데?"
"뭐가?"
"아무 이유 없이 나 도와주겠다고 하는 건 아닐 거 아니야."
"말하면 들어 주냐?"
일훈이 고개를 돌려 은광과 눈을 맞췄다. 은광은 순간 일훈의 시선을 피하고 싶었으나 피하지 않고 끝까지 일훈을 보았다.
"뭔데?"
아무도 알아선 안되는 비밀이라도 듣는 것 마냥 속삭이듯 묻자, 일훈은 말없이 은광을 응시했다. 아까의 나른했던 표정은 어디론가 사라져버리고 먹이를 눈앞에 둔 굶주린 맹수 같은 표정이었다. 은광이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그때, 일훈이 느리지만 피할 수 없을 만큼 위협적으로 다가와 입술을 맞붙였다. 화들짝 놀란 은광이 몸을 뒤로 빼려 했지만 일훈은 은광의 위로 올라타 팔을 붙잡았다. 바닥에 짓눌려 움직일 수 없는 상태가 된 은광이 바르작거리며 벗어나려 해도 일훈은 꿈쩍하지 않았다. 은광이 인상을 쓴 채 눈을 질끈 감고 처음으로 하는 키스를 겨우 받아내고 있었을까, 일훈의 입술이 천천히 떨어지더니 그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너, 나랑 자자.
예상치 못한 요구에 은광의 눈이 커다래졌다.
계약의 시작이었다.
#3
추락하던 새가 땅을 딛고 다시 도약하려는 데 발을 붙잡혀 날지 못하면 이런 기분이 들까.
이유 모를 죄책감이 자꾸만 은광의 가슴속에 사무쳤다. 일훈에게 몸을 주고 나면 왠지 이유 모르게 몸을 팔아 생명을 연장하는 사람이 된 기분이었다. 일훈은 은광의 얼굴을 슥 내려다보더니 말없이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은광은 눈물이 차오를 것 같아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일훈은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계속 다독이듯 어깨를 천천히, 그리고 부드럽게 토닥였다.
은광은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무한한 갈증을 느끼는 사람처럼 일훈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사랑하는 사이도 아닌데, 그의 입에서 달콤한 말이 나오지도 않았으며 딱히 보호라고 칭할 것도 없었다. 그냥 옆에 끼고도는 것뿐이었다. 아무런 사이도 아니지만 일훈의 품에 파고들 때마다 은광은 출처 모를 안정감을 느꼈다. 하지만 한편으론 늘 걱정했다. 내 몸이 질리면, 내 몸을 주지 않으면 일훈의 보호도, 품도, 다독거림도 사라지겠구나. 은광은 스스로를 기생충 같은 삶이라 자책하며 잠에 빠져들었다.
성재가 이를 빠득빠득 갈며 은광의 엎드려 있는 정갈한 뒤통수를 쳐다보았다. 요새 자꾸 은광을 끼고 다니는 일훈 때문에 화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일훈에게 그 이유를 따지러 갔다 크게 망신을 당하고 왔다. 구겨진 자존심을 반드시 그대로 갚아줘야 직성이 풀릴 것만 같았다. 어차피 일훈을 건드리지만 않으면 괜찮은 일이 아닌가. 성재는 은광을 바라보며 작게 미소를 띠었다. 일훈을 건드리지 않고도 자존심에 금을 가게 할 대안이 떠오를 것만 같았다.
잠에서 깨어난 은광이 살며시 눈을 떴다. 마지막 시간에 잠이 들었던 것 같은데, 눈을 뜨니 아무도 없었다. 교실 안으로 주황빛 노을이 쏟아져내렸다. 부모님 단체 면담 때문에 야자도 없었기에 아이들은 모조리 집으로 갔고 선생님마저 그냥 퇴근하신 것 같았다. 은광은 허리를 세워 일어나 주변을 확인했다. 일훈도 집에 간 모양인지 덩그러니 놓인 책걸상엔 아무것도 없었다. 왠지 모를 서운함이 느껴졌다. 은광이 가방을 정리해 멨다. 그래, 일훈이 제 애인이 된 것도, 그렇다고 친구가 된 것도 아니다. 자고 있는 은광을 깨울 필요는 없었다. 요즘 일훈 덕에 성재의 행패가 줄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고마웠다.
신발을 챙겨 바깥으로 나온 은광이 복도를 터덜터덜 걷고 있었을까, 조용하던 복도 끝에 학생 서너명이 보였다. 아무 생각 없이 그들을 지나치려 했지만 점점 다가갈수록 그들의 얼굴이 정확하게 보였다.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낀 은광이 방향을 틀어 빠르게 걸어갔다.
"야, 서은광!"
그러자 뒤에서 은광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가 들리자마자 은광은 냅다 뛰기 시작했다. 사력을 다해 달렸지만 선천적으로 폐가 약했기에 얼마 가지 못하고 잡히고 말았다. 은광은 다시 머리채를 잡혀 체육 창고로 끌려갔다.
"이거 놔!"
은광이 제 머리를 쥐고 있는 성재의 팔을 내려쳤다. 그리곤 상황을 파악했다. 창고의 문은 잠가져 있었고 주변엔 뜀틀과 먼지가 내려앉은 매트리스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은광은 주머니의 휴대폰으로 경찰에 신고하려 했으나 그만 들켜버려 성재에게 휴대폰을 뺏겼다.
"내일은 토요일이고 어차피 면담 때문에 학교도 안 오겠다, 어디 여태 못 맞았던 거마저 다 맞아 볼까?"
"싫어."
"뭐?"
"나한테 이러는 이유가 뭐야!? 내가 가난해서 그러는 거야? 왜 그러는 거야 왜!"
"이 미친 새끼가!"
화가 난 성재가 손을 힘껏 들어 은광의 머리를 내리쳤고 은광은 매트리스로 엎어졌다. 이미 이성을 잃은지 오래인 은광은 벌떡 일어나 성재에게 달려들었다. 갑작스러운 반격에 성재도 은광에게 몇 차례 얻어맞았지만 은광은 이내 같이 들어온 놈들에게 포획되었다.
"요즘 정일훈이 단단히 너 끼고돌던데."
은광의 동공이 눈에 띄게 확장됐다.
"내가 말이야, 일주일 전쯤 정일훈한테 무슨 수모를 당했는지 아냐?"
"어쩌라고, 정일훈한테 원한이 있으면 걔한테 가서 따지지 왜 나한테 이래?"
"왜 널 끼고 도냐니까 아주 작정하고 눈 뒤집으시던데. 너희 무슨 거래 같은 거라도 했냐?"
"...."
"내 생각엔 말이야, 정일훈은 차고 넘치는 게 돈이니까 뇌물 같은 건 필요 없을 것 같고, 너도 줄 수 있는 게 딱 하난 것 같은데."
비죽 웃어 보인 성재가 턱짓으로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두 사람이 달라붙어 은광을 붙잡고는 옷가지를 벗겨냈다. 눈을 크게 뜬 은광이 발악했다. 바로 어제 관계를 맺은 탓에 몸 곳곳에 남아있을 일훈의 흔적이 발각될 게 뻔했다. 악을 쓰고 고함을 지르며 발버둥 쳤지만 남자 둘의 힘을 감당해낼 리가 만무했다. 은광의 가슴팍 위로 새겨진 자국들을 흥미로이 관찰한 성재가 있는 대로 비아냥댔다.
"정일훈이 너 데리고 있던 게 다 이거 때문이었네?"
"...."
은광이 입술을 꽉 깨물었으나 덜덜 떨리는 걸 주체할 수 없었다. 눈물이 새어 나오려는 것을 온 힘을 다해 참으며 성재를 노려봤다. 은광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은 성재가 제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은광이 말을 잇기도 전에 셔터음 소리가 들리더니 성재의 휴대폰에 은광의 사진이 고스란히 저장되었다.
"너, 내가 앞으로 종종 부를 건데."
은광에게 가까이 다가와 입술 언저리에서 속삭였다. 그 눈빛이 역겨워 은광은 눈을 피하지 않고 성재를 노려보았다.
"그때마다 재깍재깍 나와. 만일 안 나온다거나..."
성재의 손가락이 은광의 턱 선을 타고 내려와 목석을 훑고는 이내 가슴팍으로 향했다.
"정일훈한테 가서 일러바치면... 알지?"
"...."
"이 사진 뿌릴 거야. 물론 사진은 이게 다가 아니지. 지금부터 100장 넘게 찍을 거니까."
해가 완전히 저문 저녁이 되었다. 성재는 늘 그랬듯이 담배를 피우다 은광에게 던진 후 창고를 벗어났다. 은광이 겨우 몸을 일으켰다. 죽느니만 못한 것 같았다. 차라리 얻어맞았을 때가 훨씬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옷을 여민 은광이 뜀틀에 몸을 기댄 채 웅크려 숨죽인 울음을 토해냈다. 일훈이 내민 손이 더 큰 화를 일으킨 것만 같아 일훈이 밉고 원망스러웠다. 오늘 저를 깨우지 않고 혼자 가버린 일훈이 너무나 야속했다.
옷가지는 추슬렀지만 만신창이가 되어버린 몸과 마음은 도저히 추슬러지지가 않았다. 지금 마음 같아선 어머니고 뭐고 딱 죽어 버리고 싶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처음부터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나 자라 평범하게 살았더라면, 이런 수모는 겪지 않으며 살았을 텐데. 세상이 원망스럽고 스스로가 원망스러웠다. 왜 자신이 숨을 쉬고 살아가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그 정도로 은광의 정신은 피폐해져 있었고 누가 툭 건드리면 그 자리에서 쓰러질 정도로 위태롭게 벼랑 끝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4
면죄부는 어디서 살 수 있는 거지
은광이 책상에 엎드려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먼 과거에는 천국에 가고 싶거든 면죄부를 사서 원죄를 없애라 하였다. 그래서 누구나 할 것 없이 면죄부를 샀고 면죄부를 얻은 사람들은 끝없이 죄를 저지르고 또 저질렀다.
사실 면죄부 같은 것도 별 필요 없었다. 부자들이야 현대에 와서도 죄를 짓고도 로비라는 방법을 통해 면죄부를 쉽게 구입했지만 없는 놈들은 없는 놈들답게 내려지는 응당한 처벌을 받아 마당 했으니까. 이제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았다.
은광은 등교하기 전 차려져 있는 아침밥을 먹었다. 그리고 상 위에 은광이 여태까지 먹을 것 살 것 아껴 모아둔 돈이 든 통장을 올려두었다. 동네를 빠져나오겠다는 어릴 적 다짐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오늘 자신이 저지를 일로 구치소에 들어가고 인생에 줄이 그인다 해도 상관없었다. 그 정도로 은광은 독기 그 자체가 되어버렸다.
어김없이 비가 억수처럼 쏟아지는 날이었다. 지독하고 질긴 장마의 시작이었다. 꿉꿉하고 눅눅하면서도 어두운 공기가 반 전체를 휘감고 짓누르고 있었다.
은광이 그날 창고에서 도망치듯 사라진 뒤 다시 일주일 동안 학교에 나오질 않다가 홀연히 나타났다. 몇몇의 아이들은 일주일 만에 나타난 은광을 바라보았지만 딱히 어디 갔다 이제 온 거냐고 말을 걸어오는 사람은 없었다. 은광은 꿋꿋이 허리를 펴고 앉아 교과서를 쳐다보았다. 때마침 등교한 성재가 친구들과 떠들며 문을 열고 들어오다 은광을 발견했다.
"며칠 안 보이던 얼굴이 여기 앉아 계시네? 몸이라도 팔다가 왔어?"
입에 담기 힘든 말들을 제 친구들과 나누며 낄낄거렸다. 하지만 은광은 들은 체도 하지 않고 그저 책만 바라봤다. 성재는 그런 은광의 태도에 심기가 거슬렸는지 표정을 굳혀 보였지만 담임이 들어오는 바람에 별말없이 제 자리에 가 앉았다.
그렇게 나른하고 고요하고 조금은 습한 하루가 흐르고 석식 시간이 되었다. 수업에 지친 아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밥을 먹으러 갔다 왔지만 그중에는 비가 와 귀찮다고 안 가는 아이들도 더러 있었다. 은광은 가라앉은 시선으로 멍하니 앉아 있었다. 지나치게 고요하고 침잠되어 있는 은광의 축 처진 어깨 위로 묘한 독기 같은 것이 서려있는 것만 같았다.
때는 야자 시작 시간이 30분가량 남았을 때였다. 교실에는 밥을 먹고 온 아이들이 어느 정도 차 있는 상태였고, 물론 그중에는 성재도 있었다. 뒷자리에 앉아 있는 성재의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은광의 귀에도 똑똑히 들리는 말이었다.
"야. 내가 재밌는 거 보여줄까?"
"뭔데?"
"어~ 나한테 미쳐서 몸 파는 애가 하나 있는데 말이야, 내가 걔 사진을 찍어놨거든."
굳이 뒤돌아 보지 않아도 성재의 시선이 은광의 뒤통수에 꽂혀 있다는 걸 느꼈다. 아이들은 어느새 성재 주변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혈기왕성한 고등학생들은 당연히 여자이겠거니 생각했고, 빨리 공개하라며 환호성을 내질렀다.
기다려 봐~ 휴대폰 어디에 있을 텐데~
한참을 뜸 들이던 성재는 이내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그리곤 일부러 큰 목소리로 공개하겠다고 외쳤다. 그 소리를 시발점으로 은광이 벌떡 일어났다. 일어남과 동시에 넘어지는 책상의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교실의 모든 사람들이 은광에게 시선을 옮겼다.
잠시 제자리에 서있던 은광이 휙 하고 돌아 성큼성큼 다가갔다.
"뭐야?"
성재의 얼굴에 웃음기가 잔뜩 서려 있었다. 은광이 그런 성재의 팔목을 붙잡아 교실 뒤쪽으로 끌고 나갔다. 그리고 예전에 성재가 저에게 했던 것처럼 온 힘을 다해 성재를 밀치고는 그대로 달려들어 쓰러진 성재 위로 올라타 그 얼굴에 주먹질을 했다.
아이들은 어느 하나 은광을 말리지 않았다. 그저 웅성웅성하는 소리만이 커질 뿐이었다. 웅성거림은 점점 커져 환호성으로 커져갔고, 커지는 소리에 다른 반 아이들이 몰려오는 소리도 들렸다. 그렇게 온갖 난잡한 소리가 한 곳에 섞여 소음을 만들어 냈지만 은광에겐 그런 것은 전혀 들리지 않았다. 오로지 성재를 죽도록 때려야겠다는 일념 하나에 사로잡혀 미쳐있었다.
성재 또한 맞고만 있지는 않았다. 은광을 밀쳐내고, 발로 걷어 차 냈지만 은광은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나 성재의 온몸을 차고 다시 올라타 얼굴을 부술 듯이 때렸다. 성재의 휴대폰을 발로 밟아 부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미 부서진 지 오래인 휴대폰을 밟고 또 밟았다. 결국 성재의 얼굴에서 피가 나기 시작해서야 몇 사람이 은광을 뜯어말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은광은 그의 체구에서 나오기 힘든 엄청난 힘으로 말리는 손길을 뿌리치고는 제 주머니 속에서 커터 칼을 꺼냈다. 이미 제정신이 아닌 은광에게 보이는 것은 없었다. 그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보이지도 않으며 사고 회로가 멈춘 듯 이성적인 판단도 할 수 없는 상태였다. 그대로 성재의 위로 올라타 드르륵하는 소리와 함께 커터 칼을 들고 있는 손을 높게 들어 올렸다.
툭, 성재의 목 옆으로 커터 칼이 맥없이 추락했다. 교실이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은광의 헉헉거리는 숨소리와 콜록거리며 피를 뱉어내는 성재의 신음만이 교실을 채웠다. 은광의 시선은 성재에게 꽂혀 있었다. 다시 교실이 소란스러워졌다. 성재를 그의 친구들 일으켜 부축했고, 선생님을 부르러 달려가는 소리도 들렸다. 선생님이 달려오기 전에 반을 빠져나가 밖으로 향했다. 가방을 가져올 겨를도 없었다. 운동장을 거슬러 나가는데 구급차가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학교 안으로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구급차의 청색 불빛을 바라보던 은광이 다시금 억눌린 눈물을 토해냈다. 은광의 얼굴은 눈물인지 빗물인지 모를 것들로 잔뜩 젖어있었다. 정문 밖을 나온 은광이 한참 동안 이곳이 어디인지도 모른 채 달렸다. 결국 낯선 골목에 쓰러지듯 주저앉아 창피한 지도 모르고 엉엉 울어댔다.
눈을 떠도 악몽이었고, 눈을 감아도 지속되는 악몽 그 자체인 은광의 세계 중에서도 계속되는 빗줄기에 습하고 눅눅하고, 지독히도 평화로운, 8월 어느 날이었다.